본문 바로가기

결혼

#17 결혼일기 '두려움을 수반하는 사랑' 나는 과거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와 오랜 연애를 했지만 그 연애의 전면모가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생생하게 기억하는 순간이 있는데 바로 겨울의 한파에서 길한자락 위의 뒷모습이다. 내가 그와 교제를 시작했을때 나는 마음이 아프곤 했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느낀 배신감과 앞으로 삶에 대한 막막함 나에 대한 자책까지 더해져서 집 밖에, 아니 방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나가는게 두렵고 힘겨웠다. 그런데 봄날의 햇살같은 그가 매일같이 우리집 문 앞까지 찾아와서 문을 두드렸다. 마음이 아프고 허물어져서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 스스로가 너무도 싫고 혐오스러울 때 그가 매일같이 나를 보고 싶어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이라도 되는 듯이 나를 찾아와서 내 얼굴을 볼 때마다 감탄하고 싱글벙글 웃었다.. 더보기
#11 결혼일기 '별별' 결혼 전만 해도 결혼이 별건 줄 알았다. 결혼 후에 이젠 결혼이 별거 아닌 줄 안다.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 보면 결혼정보회사 광고 사진을 보게 된다. 아주 예쁘게 꾸민 한 쌍의 남녀가 요리를 하는 사진 함께 누워서 책을 읽는 사진 카메라를 바라보고 행복한 듯 미소짓는 사진 보다보면 나 또한 미소짓고 행복해지게 된다. 하지만 결혼생활이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만약 나의 결혼을 카메라에 담는다면 나와 그는 거지꼴을 하고 무표정으로 요리를 하고 각자 누워서 핸드폰을 하던지 책을 읽고 카메라를 바라보며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을까? 현실은 일상이 주를 이루니까 말이다. 더보기
#9 결혼일기 '선' 그 애를 만난 건 22살 3월이었다. 같이 사는 언니가 "산냥아, 괜찮은 남자를 만나면 깃발을 꽂아야 한다." 라고 말한 터라, 이성에 대한 촉을 잔뜩 세운 때였다. 대학 졸업 전에 남자친구는 만들고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애는 마치 중학생 같았다. 축구 좋아하는 중학생. 거기서도 남자친구 만들기는 글렀다 싶어서 일이나 열심히 하자고 생각했다. 어느날 동아리 모임을 하는데 누군가 뒤늦게 참여한다고 했다. 아뿔싸, 늦은 한 사람을 위한 저녁밥이 없었다. 내 것이라도 주면 좋으련만, 이미 먹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얼른 뛰어서 도시락을 사왔다. 뒤늦게 온 사람은 그애였다. 안 올 줄 알았는데. 그 애는 정말 성실했다. 다른 일이 있어도 무조건 모임에 참여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애는 축구모임을 하는 .. 더보기
#8 결혼일기 '대화가 필요해' 가만히 앉아서 우리 부모님이 하시는 대화를 들으면 대화가 아닐 때가 많았다. 각자 본인이 할 말을 하고, 그런 대화의 와중에 의논해야할 것은 다 해결하고, 결론낼 것은 다 결론 내고 두 분 다 만족스럽게 끝나는 대화 아닌 대화.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고 했던가? 나와 그의 대화 중 절반 이상이 의미없는 대화 아닌 대화이다. 여보 나 사랑해? 여보 엄청 사랑하지 왜? 소중하니까? 왜 소중한데? 사랑하니까? 그게 뭐야 순환명제야?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대화를 하곤 한다. 나는 똑같은 질문을 하고, 그는 똑같은 대답을 한다. 여보 혹시 내가 한심해보여? 아니? 내가 어떻게 여보가 한심해. 여보는 정말 대단하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당연하지 여보는 정말 멋있어. 물론 내 눈에. 치이...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더보기
#7 결혼일기 '속았다.' 그를 처음 봤을 때는 별생각 없었다. 뭐, 있구나. 정도? 동아리 mt에 그가 참여했을 때 나는 선배된 도리로 신입생인 그에게 물었다. 어때 대학생활 할 만 하니? 재밌는 건 있어? 그는 대답대신 씩 웃었다. 씩 웃는 이빨 사이에 고춧가루가 끼어 있었다. 아, 김치요리를 먹었나보구나 나도 미쳤지. 씩 웃는 그의 모습이 순박하고 귀여워 보였다. 동아리 모임을 할 때 그는 말이 없었다. 과묵한 모습으로 누가 어떤 말을 하던지 묵묵히 들어주던 사람이었다. 그는 매번 나를 찾아왔다. 한번은 내가 책을 놓고 가서 가져다 주겠다고 (나 어짜피 내일 동방 갈꺼였는데..? 그 책 당장은 필요없는데..?) 한번은 고생하시는데 커피드시면서 하시라고 (나 딱히 고생하지는 않는데..? 그리고 너 짠돌이잖아..?) 한번은 학교.. 더보기
#5 결혼일기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 그는 개발자이다. 회사에 다녀오면, 집에서 재차 개발을 하곤 한다. 그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대로 실행에 옮긴다. 이번에는 여자친구 어플을 만든다길래 그런가보다 했는데, 지나가다 힐끔 보니 웬 예쁜 여자와 랜덤 채팅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심지어 그 여자는 그에게 하트를 붙여 가며 오빠오빠 거리는 게 아닌가? 그때 느껴봤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 아니지 아니야. 실제로 피가 발가락에서 머리까지 솟았다. 기분이 아니라 실제로. 이성적으로는 개발 중인걸 알고 있으며 대화 내용을 보면 감정적인 교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머리와 마음은 달라서 내 피는 차갑게 식었다. 이런 나도 오죽한데 배우자가 배우여서 애정신이 있거나실제로 배우자가 바람을 피는 경우는도대체 어떤 정신으로 견디시는걸까? 그리고남자가 무슨 말을.. 더보기
#6 결혼일기 '혼자 만의 경쟁' 한국인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밥이다. 우리 부모님은 벌써 30년째 함께 살아오고 계신다. 두 분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데 대표적인 것이 밥 즉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이 다르다. 엄마는 된 밥을 좋아하시고 아빠는 진 밥을 좋아하시며 엄마는 꼬들꼬들한 라면을 좋아하시고 아빠는 푹 퍼진 라면을 좋아하신다. 라면의 경우 엄마가 먼저 라면을 드시고 라면이 푹 퍼질 즘에 아빠가 라면을 드시는 것으로 합의를 볼 수 있었겠지만 밥의 경우엔 얘기가 다르다. 어느 날 새벽, 엄마가 밥을 하고 계셨다. 나에게 굉장히 이색적인 풍경으로 보통 우리 엄마는 새벽기도에 갔다가 운동을 가시거나 아침잠을 주무시기 때문이었다. 놀라서 대체 엄마 지금 뭐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긴 진 밥이 싫댄다. 그렇다고 부지런히 밥을 해주는 아빠에.. 더보기
#4 결혼일기 '내가 너랑 결혼해도 될까?' 어쩌다보니 착착 흘러가서 결혼까지 다다랐지만 만약 그와의 관계에서 조금이나마 불안한 점이 있었다면 이 관계가 흘러가도록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20살의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나는 결혼할 여자 아니면 사귈 생각 없어요. 라고 22살의 내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그렇구나 너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그리고 나는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어. 라고 말했다. 그리고 6년 정도의 연애 기간 동안 그는 항상 결혼을 이야기했고 노력했다. 웃기게도 나는 그와의 결혼을 고려하며, 그와 만나며 진지하게 이 사람이 결혼해도 될 사람인가 검증했다.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갈 때는 하루, 전쟁에 나갈 때는 이틀, 결혼할 때는 사흘을 기도해야 한다. 그만큼 결혼이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