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결혼일기

#17 결혼일기 '두려움을 수반하는 사랑'

728x90
나는 과거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와 오랜 연애를 했지만 그 연애의 전면모가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생생하게 기억하는 순간이 있는데

바로 겨울의 한파에서 길한자락 위의 뒷모습이다.

 

내가 그와 교제를 시작했을때 나는 마음이 아프곤 했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느낀 배신감과 앞으로 삶에 대한 막막함

나에 대한 자책까지 더해져서 집 밖에, 아니 방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나가는게 두렵고 힘겨웠다.

그런데 봄날의 햇살같은 그가 매일같이 우리집 문 앞까지 찾아와서 문을 두드렸다.

마음이 아프고 허물어져서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 스스로가 너무도 싫고 혐오스러울 때

그가 매일같이 나를 보고 싶어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이라도 되는 듯이 나를 찾아와서

내 얼굴을 볼 때마다 감탄하고 싱글벙글 웃었다.

 

이솝우화 중 '햇님과 나그네'를 아는가?

추운 겨울길, 외투를 단단히 여맨 채 걸어가는 나그네가 있었다.
그 나그네를 보고 햇님과 바람이 내기를 한다.
둘 중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사람이 이기는 내기.
바람은 온 힘을 다해 사납게 몰아치지만
나그네는 외투를 더 단단히 싸맬 뿐이다.
그리고 햇님은 따스한 햇살을 나그네에게 보내고
충분히 따뜻해진 나그네는 꽁꽁 싸매던 외투를 벗어버린다.

사람의 마음이 치유되는 방식은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이 아프고 고단할 때 나는 마음을 꽁꽁 싸매고 상처 속으로 깊이 침잠했다.

그런 나에게 찾아온 그는 햇님같았다.

바람처럼 마음을 열라고 종용하지 않고

따듯하게 내 주위를 멤돌며 마침내는 나 스스로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도왔다.

깊이 가라앉아있던 나를 꺼내준 것이다.

 

그는 매일 나를 찾아왔고 막차 시간까지 나와 함께 있다가

그 추운 겨울길을 달려 되돌아가곤 했다.

"내일은 그가 안올지도 몰라. 그러니까 나는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해"

하는 부정과 두려움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정말 그는 신실하게 매일 와서 매일 그 뒷모습을 나에게 보여줬으니까.

 

그래서 결혼한 지금.

나는 매일같이 그의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바쁘고 지칠 때는 물론 힘들지만 행복하고 즐겁다.

온힘을 다해 나를 사랑해줬던 그 사랑을 내가 다시 그에게 돌려줄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