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12 서평 '아내가뭄'

이산냥 2023. 12. 29.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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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아내가뭄이라서 1인가구의 증가와 관련된 책인가 싶어서 빌렸는데

나의 추론이 엇나갔다. 페미니즘에 대한 책이다.

결혼을 한 여성으로 살고 있는 요즘, 왜 내가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이유를 찾는 중인데

이 책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정희진님은 이 책의 해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출산은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아니다.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다.(기혼 부부의 출산율은 1.9명으로 두 명을 육박한다.)
대한민국에는 결혼한 여성을 위한 인프라와 사회적 존중 문화가 전무하다.
여성들은 더 이상 국가, 사회, 남성 개인의 변화를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 여성들은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아이를 낳지 않음으로써, 사회를 구하고 자신을 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출산은 절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에 어느정도 동의한다.

그런데 나는 결혼한 여성이 아니라 출산할 여성을 위한 인프라와 사회적 존중문화가 전무하다고 바꿔서 생각하고 싶다.

정말 저출산이 심각한 문제라면 출산의 바운더리를 결혼 제도 내부가 아닌 외부로 확장시켜서

출산 자체에 대해서 놓고 고민해야하지 않을까?

어째서 결혼 제도만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아이를 안 낳는 대상인 여성을 겨냥하는 것일까?

저출산은 누구를 탓하고 무엇을 전제로 할 것이 아닌 사회 전체의 문제인데

범위 축소와 특정 대상을 겨냥한다는 것은 사회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돌리겠다는 의도가 아닐까?

그렇다면 사회를 이끌어가는 분들이 정말 저출산에 관심이 있는지 의구심을 갖게 된다.

더이상 누군가의 희생에 기대어 출산율을 올리는 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는 해제에 대한 이야기였고 책의 본격적인 주장으로 들어가보자.

이 책의 저자는 애너벨 크랩이라는 정치 평론가이다.

저자는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집안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배우자가 있다면 당연히 직장에서 성공하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여성들이 정치나 기업경영에 참여하는 비율이 낮은 이유로 남성 위주의 문화나 여성의 승진을 막는 상사, 적극성이 부족한 여성의 성향 등을 들었다. 오늘이 학교에 사복을 입고 가는 날인지 아닌지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집에 있느냐 없는냐는 그 이유로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 

 

즉 여성들의 정치, 기업에 참여하는 비율이 낮은 이유는 아내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성들을 일터로 끌어들이기 위해 캠페인, 개혁방안, 사상적 기반 등을 연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 남성을 집안일로 끌어들이는 방안에 대해서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 주장의 전제는 이렇다.

사회생활과 집안일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가정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사회생활과 함께 집안일도 해야하는 사람이지만

집안일은 경제적 가치로 매겨지지 않는다.

 

나는 저자의 주장에 완전히 동의한다.

우리 부모님의 예로 들어보자면 우리 부모님 중 아내는 아버지셨다.

매주 토요일 아버지 혼자 대청소를 하고 내가 하교를 하면 웃음으로 맞아주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랐다.

아침엔 보약을 들고 나를 깨우셨고 밖으로 나가면 아빠가 차려주신 아침상이 펼쳐져 있었다.

학예회, 학부모 상담, 진학상담에 아빠가 오시는 것이 익숙했고

아빠가 나의 성적에 관심을 가지고 선생님께 전화해서 상담하는 것이 익숙했다.

부모님 두 분 다 맞벌이를 하셨지만 우리 아빠는 집안일에 좀 더 신경쓰는 분이셨다.

 

언젠가 엄마가 우리 세자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 셋은 엄마한테는 불충분하다고 말해도 되지만 아빠한테는 그러면 안돼.

아빠는 우리 세 자매를 위해서 평생을 헌신하셨고 우리를 끔찍히 사랑하셨다.

엄마에게 육아비중을 물어봤을 때 엄마아빠의 비중이 6:4라고 했을 때

아빠가 크게 놀라면서 자신이 6이라고 할 만큼 아빠는 육아에도 적극적이었다.

그 옛날 90년대에 아기띠를 매고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육아대디셨으니 말이다. 

다른 아빠들처럼 돈을 많이 벌어와서 돈으로서 가정의 든든한 울타리를 치는 가장은 아니었지만

우리 아빠는 자식들을 먹여살릴 충분한 돈을 벌어오셨고 집안일까지 감당하셨던 것이다.

그런 아빠가 아내로 존재해준 덕분에 우리 엄마는 평생의 꿈을 이루어서

직업을 가지고 사회생활에 충실할 수 있게 되었다.

아빠는 남성으로서 정말 충분했다. 그리고 진정으로 멋진 남성이었다.

 

저자의 말처럼 아빠의 가정활동은 경제적 가치로 매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경제적 지표에 대해서 실망하게 되고 가족에게 미안함을 갖게 되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어디 세상일이 경제적 지표로 모든 것을 나타낼 수 있다던가

나타내지 못하는 부분에서 헌신하는 것이 그 이상으로 귀중한 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페미니즘책이라고 한다.

보통은 페미니즘 책을 읽을 때 남성을 비판하는 부분에 있어서 불편해지는데 

이 책은 불편함이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남자이던지 여자이던지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한 공생방안을 진지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생을 위한 저자의 고민과 열정이 느껴진다.

나는 아직 페미니즘이 뭔지 잘 모르지만 우리 부모님께서 이미 페미니즘을 실천하셨다고 생각한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부부로 살면서 성별로 서로의 역할과 성격을 규정짓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써 서로를 대하며 상대의 생각과 성격에 맞게 역할을 분담하면서 공생하는 것.

그것이 페미니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