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자매이야기

#16 세자매 일기 "네, 제가 태어났습니다. 전 피곤하니 자볼게요."

728x90

오늘은 나, 이산냥의 이야기를 써보고자 한다. 
나는 2월의 어느 날 새벽 2시 12분에 태어났다고 한다. 
내가 태어나던 날에 추웠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산통을 느낀 엄마가 병원으로 향했을 것이고, 일터에 있던 아빠에게 이 소식이 갔을 것이다. 
 
나를 갖고 나서, 우리 엄마는 당근을 착즙하여 만든 신선한 당근주스를 자주 마시곤 했다.
아빠는 그런 엄마를 위해서, 공판장에서 흙당근을 사다가 정성스레 흙을 제거하여 씻고
수동식 착즙기에 깨끗하게 씻긴 당근을 넣어서 당근주스를 만드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엄마 뱃속에 내가 들어있다는 것을 안 날. 
우리 부모님은 둘이 손을 꼭 붙잡고, 꽤 먼거리의 길을 행복하게 걸었다고 한다.
 
가진 돈은 많지 않은 가난한 신혼부부였지만
서로를 위하는 사랑만큼은 꽤나 풍족하여서 둘의 마음을 가득 채워 넘치고도 흘러나와
사랑의 결실인 나를 안전하게 둘러쌀 수 있을 정도였다.
 
신혼부부에게 첫 임신, 첫 아이는 특별했다.
모든 것이 처음이고 서툴렀지만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고 행복했다. 
그리하여, 처음이자 마지막 육아일기가 꼭 내 편만 남아있기도 하고 
내가 태어나던 시간과 순간을 아빠가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기도 하다. 
 
아무튼 우리 엄마가 산통을 시작하고, 그러한 소식을 들은 아빠는 허둥지둥 회사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집에 가서 깨끗하게 목욕을 하고 당근을 사다가 엄마가 좋아하는 당근 주스를 착즙해서
서둘러 엄마에게 향했다고 한다.
아이를 낳고 힘이 들어할 엄마를 태우기 위해서 큰 트럭을 빌려서 운전해 갔다. 
산통에 힘들어하던 엄마는 어찌하여 남편이 이렇게 늦게 왔는지 의아했지만
사랑하고 의지가 되는 남편이 와서 조금은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마음의 위안과 출산은 비례하는 것이 아니어서,
엄마는 20시간 이상을 지옥같은 진통에 시달리다가
저승 문턱을 정말 여러번 왔다갔다하고 저승사자 얼굴을 몇번이나 본 후에
정말 숨이 넘어갈 뻔한 직전에 다행스럽게 나를 낳았다고 한다. 
어찌나 출산의 고통이 심했는지,
품고 있을 때 내내 행복을 주던 아이의 얼굴이 보기 싫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고된 출산 후 힘들어하던 엄마는 뭔가 이상함을 느낀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것이다.
꽤나 오랫동안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는 몇 시간 뒤에 밝혀지게 된다.
나를 낳고 너무나 기쁜 아빠가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리러 간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태어난 시간은 새벽 2시 12분. 
그 꼭두새벽에 그 누가 그렇게 기쁘게 그 전화를 받았겠는가.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아빠는 너무나 기뻤다고 한다.
 
이날이었다. 평생 엄마가 어이없어하며 나를 낳을 때 아빠의 행동을 이야기하게 된 것의 시작은.
초보아빠 지혜자는 모든 게 서툴러서 
평소에 엄마가 그토록 좋아하던 당근 주스를 준비하고,
사랑하는 자신의 아기를 처음 맞이하는 순간을 위해서 목욕제계를 하다가 
엄마의 출산에 늦었다. 
엄마는 도대체, 아이를 낳으면서 사지를 넘나드는데 당근주스를 어떻게 먹냐고 했고
아기는 자신이 낳는데 도대체 아빠가 목욕제계를 해야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했다. 
 
그리고 아빠는 출산 이후 완전히 지치고 아픈 엄마를 두고 가서 전화를 돌렸다. 
너무 신나고 행복했기 때문에 이 기쁨은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엄마는 도대체 그 새벽에 누가 그 전화를 기쁘게 받을 것이며
자신은 정말 죽기 일보직전인데 남편이 없어져서 정말 놀랐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아빠는 출산으로 힘들 아내를 위해서 큰 차를 빌려서 엄마를 데리러 갔는데
엄마는 차가 너무 크고 높아서 막 출산한 자기가 타는게 너무 힘들었기때문에 그 차를 타지 못하고 다른 차를 타고 갔다고 했다. 
홀로 빌린 차를 타고 가던 아빠는 심지어
트럭을 타고 1차선으로 당당하게 달리다가 화물차 차선 위반으로 교통경찰에게 걸려서 딱지를 끊었다고 한다.
경사날에 딱지라니!
 
하지만 서툴고 실수가 많을지언정, 타이밍은 안 맞았을지언정. 
엄마가 좋아하던 음식을 기억해서 손수 준비한 아빠의 정성과 
첫 아기를 맞이하기 위해서 정갈하게 자신을 준비하는 아빠의 설렘,
막 태어난 자신의 아기를 기뻐하고 축복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받고 싶었던 아빠의 마음, 
힘든 엄마를 위해서 어렵게 차까지 빌려온 아빠의 사랑과 배려에 
엄마는 내내 행복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투박하지만 부지런히 노력하고 사랑하는 아빠 덕분에
엄마는 사랑에 파묻혀 살고 계신다.
그리고 자신의 투박함과 서툶에도 격려하고 고마워하는 엄마 덕분에
아빠 역시 사랑에 묻혀 살고 계신다. 
 
그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신혼부부는 어느덧 중년의 부부가 되었다.